2017年11月24日 星期五

小中華4@朝鮮王朝實錄-中宗實錄-三年(1508)

小中華4@朝鮮王朝實錄-中宗實錄-三年(1508)


小中華4@朝鮮王朝實錄-中宗實錄-三年(1508)



史/編年/朝鮮王朝實錄/中宗實錄/三年(1508) 卷五至七/卷七 十月至十二月/十月/22日



○丙戌/御朝講。持平申鏛、正言洪彦弼論前事。


申鏛又曰:“人才之不作,莫此時若也。在成宗朝,養育人材,多士輩出,不幸廢主,誅竄殆盡。



自此以後,士氣蕭索,不志文學,先有媒進之心,此勸勵之不得其道也。近者令武士試射,優等者輒賜賞物,武人以爲榮,爭相鍊習。



如儒生之居館學者,亦不時點名,或製述或講經,其入格者,或賜書冊,以示勸勉,則彼必以君賜爲榮,多有興起之心矣。”



彦弼曰:“成均館同知安琛,以病不仕,尹金孫亦無故不仕,請皆罷去,以參判中有文學德望者兼差,使之敎誨。”



知事申用漑曰:“人才之不作,果如申鏛所啓。曩時雖宰相之子,篤志學業,老而(無)〔垂〕成,乃始求官,今則不然。



纔免襁褓,皆懷媒進之心,不業文學,雖有志學者,率皆居家鍊業,不喜居館。



爲今計者,莫若擇有物望者,以爲表率。如姜景叙、南袞,兼差同知,以之訓誨,則儒生庶可興起,而樂爲赴學矣。



於是而試才,或直赴或賜書冊,則人才何患不作乎?



且四學官員,授職未久,輒遷他官,故不以久居爲計,不勤於敎導。今後四學敎授擇差,而久任者陞遷,何如?



且曩時輪次堂上,一月之內,二三次就成均館,或製述,或講經,今則廢,請申明擧行。非獨館也,四學亦依成均館例,令以堂下官有文學者,輪次仕進,考其儒生之製述。



讀書堂在京中,賜暇人員,數往來其家,朋友亦多尋訪,不得專業。龍山讀書堂修葺間,請於齊安大君豆毛浦亭子處之,使專其業。



且書堂,支應甚薄,使令不足,當優禮遇之。”上曰:“人才之不作如是,故已令推考該曹及館學官員耳。”



說經成世昌曰:“讀書堂支應等事,不足數也。如書冊、紙、筆不足,國家所藏書冊亦多,請移置,以便觀覽。”



參贊官李世仁曰:“今日所啓,皆養育人才事,請留意焉。我國雖在海外,中朝以文士之多爲美,先是天使倪謙出來,見成三問、朴彭年之才,稱爲小中華。



今弘文館官員有將來者,使久居其任,以成華國之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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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于政院曰:“豆毛浦亭子,已與大君,可於他處,移設讀書堂,安琛有病,則改差。命召尹金孫,敎以勤仕。



輪次堂上四學官員久任及讀書堂優待,弘文館久任等事,竝依經筵所啓。”



又傳曰:“欲令儒生,樂赴館學,其道安在?



其不肯居館學者,罪其父兄,無父兄則停擧,以示懲戒,何如?雖不可如此,其議次罰以啓。”



政院回啓曰:“以儒生不肯就學,罪其父兄,似未穩。上若銳意於興學,則儒生自然興起矣。”




中朝以文士之多爲美,先是天使倪謙出來,見成三問、朴彭年之才,稱爲小中華-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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庶民則男女勤耕桑之務,士夫則文武供內外之事,家家有封君之樂,世世存事大之體,作別乾坤,稱小中華-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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庶民則男女勤耕桑之務,士夫則文武供內外之事,家家有封君之樂,世世存事大之體,作別乾坤,稱小中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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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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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楼夢図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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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종실록 20권, 성종 3년 7월 10일 을사 4번째기사 / 예조에서 음란한 짓을 금제하는 조목을 기록하여 아뢰다
        정(貞正)의 풍이 있었으므로 역사(歷史)에도 「소중화(小中華)」라 칭하였습니다. 요즈음 들으니 음란한 여자가 전에는 다만 양성현(陽城縣)의 가천(加川)에 있었는데, 이제는 사방의 원(院)·관(館)과 영(營)·진(鎭) 사이에 또한 많이 있어, 봄과 여름에는 어량(魚梁)의 세금을 거두는 장소에 가고 가을과 겨울에는 산간의 승사(僧舍)에 놀러가 음...

    2. 성종실록 134권, 성종 12년 10월 17일 무오 1번째기사 / 남원군 양성지가 중국이 개주에 위를 설치한다는 것에 대해 상언하다
        의 체제가 있으며, 따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소중화(小中華)하고 부르면서 3천 9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진(黃溍) 은 벼슬살이할 만한 나라라고 하였고, 황엄(黃儼) 또한 천당(天堂)이라 하였으며, 원 세조(世祖)는 우리로 하여금 구속(舊俗)을 그대로 따르게 하였고, 명(明)나라의 고황제(高皇帝) 는 우리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허가하였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3. 성종실록 208권, 성종 18년 10월 12일 무인 1번째기사 / 중국 사신의 접대에 시위 군사의 예모를 전교하다
        말하기를, ‘조선은 실로 예를 아는 나라이다.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컫는 것이 빈말이 아니다.’ 하며, 칭찬하기를 마지 않았고, 부사(副使) 장근(張瑾)은 말하기를, ‘다만 한 가지 일이 중국 조정만 못한 것이 있다. 중국 조정에서는 전상(殿上)의 위사(衛士)가 비록 심한 더위에 땀이 흘러도 몸을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데, 지금 보건대, 전상에 모신 자가 좌우를 돌아보았으...

    4. 중종실록 7권, 중종 3년 10월 22일 병술 1번째기사 / 조강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불시의 고강·적절한 교수·독서당 예우 등을 아뢰다
        우리 나라는 비록 해외(海外 )에 있다 할지라도, 중조(中朝)에서 문사(文士)가 많다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앞서 천사(天使) 예겸(倪謙)이 나와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의 재주를 보고 소중화(小中華)라고 칭찬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홍문관(弘文館)의 관원으로서 장래가 있는 자는 오래도록 그 직에 있으면서 나라를 빛낼 인재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다.

    5. 중종실록 17권, 중종 7년 12월 26일 병인 1번째기사 / 대사헌 남곤 등이 소릉의 일을 상소하다
        없는데도, 중국 사람들이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 소중화(小中華)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대대로 예의를 닦아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비는 아비, 아들은 아들 노릇함으로써, 생민의 윤리와 사물의 법칙이 그래도 볼 만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수천 년 동안의 16세대 제왕들에게 없는 일이 유독 우리 조선에서만 보게 된다면, 오직 전고(前古)에 비춰 보아도 ...

    6.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1일 병신 1번째기사 / 홍익한이 금한을 배척하고 명분을 세울 것을 상소하다
        나라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 소문이 나서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컫고 있으며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한마음으로 사대하기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랑캐를 섬기며 편안함을 취해 겨우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월을 연장해 가고 있으나, 조종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천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 후세에 대해서는 어쩌겠...

    7. 숙종실록 44권, 숙종 32년 12월 26일 경술 2번째기사 / 보덕 최계옹이 관원들의 풍기 문란을 염려하는 상소하다
        니다. 우리 기방(箕方)을 생각한다면 예전부터 소중화(小中華)라 일컬었고 의관 문물(衣冠文物)은 옛 제도를 고치지 않았는데, 풍속이 호무를 숭상하여 태연히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가엾게도 우리 동방 사람도 이미 변하여 오랑캐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얼마전 진연(進宴) 때 내연(內宴)을 밖에서 습의(習儀)하던 날 이른바 도감(都監)의 두 제조(提調)가 처용무(...

    8. 숙종실록 65권, 부록 / 숙종 대왕 행장(行狀)
        관대(冠帶)를 하고 능히 오상(五常)을 밝혀 소중화(小中華)의 칭호를 얻도록 한 것은 기자의 힘이다. 문장을 주관하는 신하에게 각별히 제문(祭文)을 짓도록 하고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기자묘(箕子廟)에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 이윽고 승지에게 명하기를, ‘특별히 승지를 보내는 것은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니, 경(卿)은 부디 공경을 다하여 제사...

    9. 숙종실록보궐정오 19권, 숙종 [보궐정오실록] 14년 6월 14일 을묘 1번째기사 / 이조 판서 박세채가 올린 시무 12조
        문물(文物)이 찬연(粲然)하게 갖추어져서 족히 소중화(小中華)라 칭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변고(變故)를 겪고 후세로 내려올수록 풍속이 퇴폐해져, 집안에서 행하는 것이 이미 순 후(淳厚)하지 못하고, 나라에서 조치하는 것도 또한 구간(苟簡)함이 많아져 모두가 가려서 속이는 과조(科條)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 타고난 천리(天理)의 진실을 잃었으나 스스로 ...

    10. 영조실록 22권, 영조 5년 4월 30일 갑진 2번째기사 / 부수찬 권혁에게 삭출시키는 법전을 시행하라고 명하다. 이양신·이수해를 영구하여 비호한 권혁의 소장
        않고서 이에 도리어 이와 같은 짓을 함으로써 소중화(小中華)의 기풍을 더럽혔으니, 신은 특히 절통하게 여깁니다. 정묘년 16 27 인조 5년. 양조(兩朝) 효종조와 숙종조. 소중화(小中華) 우리 나라를 가리킴.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권혁이 이양신·이수해를 영구(營救)하여 비호하였고 소장의 끝에 기재한 일은 그저 풍문(風聞)만 들은 것으로 비난이 너무 심하였으니, ...

    11. 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 2월 14일 갑오 6번째기사 / 사은 정사 박명원과 부사 윤승렬의 장계의 별단
        금 공경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는데, 평소에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컫는 것이 모두 빈말은 아니었다.」고 높이 칭찬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강서(江西) 사람 대균(戴均)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원래 현관(現官) 한림(翰林)으로서 아숙(阿肅)을 스 승[老師]이라고 일컬으며 자기는 그의 문인(門人)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말하기를, ‘스승께...

    12. 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 4월 14일 계사 1번째기사 / 역적을 토벌한 것에 대해 하례하다
        부합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뜻하지도 않게 소중화(小中華)는 예의(禮義)를 숭상하는 나라인데, 이에 지극히 발칙하고 지극히 흉악한 변고가 생겼다. 아! 그 통탄함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가 있겠는가? 역적 김하재(金夏材)는 그것이 천지 개벽(天地開闢) 이후에 없던 일이니, 또한 어찌 일식·월식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변고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을축년에 ...

    13.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 5월 22일 신유 2번째기사 / 인현서원의 명칭 개칭 등에 관한 채제공·이병모·이서구 등의 논의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컫는데, 삼한(三韓) 이전에는 순수함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의문(儀文)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 많아서 지금까지 당연히 행하여야 할 전례(典禮)를 겨를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서원(書院) 명칭에 대한 한 건과 더불어 다시 예조 판서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의견 일치를 보아 초기(草記)를 올리게 하라." 하였다.

    14. 정조실록 49권, 정조 22년 9월 1일 신유 1번째기사 / 사학 유생 유춘주가 신약추에게 형률을 적용하길 상소하다
        聖朝)께서 뜻 둔 일을 계술(繼述)하시고 우리 소중화(小中華)의 문물을 빛내셨습니다. 그리고 절의를 높이 숭상하게 하고 삼강 오륜을 붙들어 일으킬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모두 다 쏟으시는 한편 또 이렇게 새로 《춘추》를 간행하시어 해와 별처럼 거듭 드러내 보여주셨으니 이제는 인심이 차분히 안정되고 세도(世道)가 바르게 돌아와야만 참으로 마땅한 것입니...

    15. 정조실록 52권, 정조 23년 12월 21일 갑진 2번째기사 /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상차하여 《흥왕조승》 4편을 올리다
        자도 오랑캐의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혹은 소중화(小中華)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왜가리 소리 를 내며 왼쪽으로 깃을 다는 저 오랑캐의 풍속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다만 왕씨(王氏) 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말갈(靺鞨)과 국경을 접하고 몽고족(蒙古族)인 원(元)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예교(禮敎)가 일으켜...

    16.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12월 22일 갑자 1번째기사 / 사학을 토죄하고 인정전에서 진하를 행하다. 반교문
        서방(西方) 세계의 음침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소중화(小中華)인 예의(禮義)의 나라에 느닷없이 불쑥 들어오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감히 크게 청명한 시대를 더럽히고자 하여 섬기는 것이 뱀의 신(神)이고 소의 귀신이며 거의 반 세상을 속이어 미혹시켜 그의 말은 지옥(地獄)과 천당(天堂)에 대한 것이었다. 신부(神父)와 교주(敎主)를 일컬어 높이 받들기를 제 조상...

    17. 순조실록 26권, 순조 23년 8월 2일 무술 1번째기사 / 성균관에서 거재 유생들이 서얼들이 상소한 것에 대해 권당한 소회를 아뢰다
        우리 조정은 중국의 밖에 있는 문치를 숭상하는 소중화(小中華)입니다. 삼한(三韓) 시대와 신라 ·고려 사이에도 여전히 비루한 이속(夷俗)을 면치 못하다가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 태조와 태종께서 고려에서 숭불(崇佛)하던 뒤에 인륜을 밝히고 고려에서 멸유(蔑儒)하던 끝에 강상(綱常)을 펼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명분(名分)’ 두 글자와 관계된 것은 그 엄중함이 분명하...

    18.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 4월 1일 병오 10번째기사 / 승정원에서 목태석의 국문을 청하다
        두워지고 인심이 날로 더욱 함익(陷溺)하여, 소중화(小中華)의 지역에 다시는 《춘추(春秋)》를 읽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또 ‘용연(龍淵)·산호(山虎)’ 등의 어구는 매우 어긋나고 무엄하였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마지막 부분에 지적한 뜻은 매우 알쏭달쏭하여 요점이 협잡(挾雜)하는 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미 시행한 법...

    19. 헌종실록 14권, 헌종 13년 8월 9일 을묘 3번째기사 / 성근묵이 상소하여 이양선에 대해 보다 더 단호한 대처를 하도록 하다
        늦추는 장책(長策)으로 여긴다면, 장차 우리 소중화(小中華)의 온 고장이 함께 멸망하여 요수(妖獸)·괴조(怪鳥)가 되어도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부터 융적(戎狄)의 화(禍)에 어찌 선악을 가릴 만한 것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이 적으로 말하면 방자하게 의리를 말하고 전에 없던 이단을 새로 만들어 성인(聖人)의 도(道)를 위협하니, 이것은 화이(華夷)·인수(人獸)가...

    20.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1월 7일 양력 3번째기사 / 김병시가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때로부터 문물 제도가 찬연히 크게 갖추어져서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렸습니다.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는 훌륭한 임금들이 서로 이어 거듭 빛내어서 오늘과 같은 경사에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이전 의 훌륭한 조상들의 아름다운 규범과 선대 임금들이 남긴 제도를 버리고 그만 이 지경에 이르게 하겠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설사 응당 시행해야 할...

    21.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30일 양력 3번째기사 / 이수병 등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다
        대를 이어왔는데, 우리나라 가 명을 받고서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임진년(1592)과 계시년(1593)의 왜란(倭亂)을 당해서는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 주셨으니, 의리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 사이지만 은혜로는 실로 아버지와 아들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삼천리강토에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모두 황제의 덕에 젖었습니다. 아!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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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종실록 20권, 성종 3년 7월 10일 乙巳 4번째기사 / 예조에서 음란한 짓을 금제하는 조목을 기록하여 아뢰다
        箕子以來, 敎化大行, 男有烈士之風, 女有貞正之俗, 史稱小中華。 比聞淫奔之女, 前則只在於陽城縣 加川, 而今也四方院、館、營、鎭之間, 亦多有之。 春夏則奔魚梁收稅之場, 秋冬則遊山間僧舍, 恣行淫亂, 汚染敎化。」 令守令、萬戶、驛丞檢察, 重論爲便。’ 臣等參詳, 淫穢之俗, 法所痛治。 今也, 號稱遊女, 或稱花娘, 淫縱自恣, 其禁制之目, 具錄于後。 一。 花娘、遊...

    2. 성종실록 134권, 성종 12년 10월 17일 戊午 1번째기사 / 남원군 양성지가 중국이 개주에 위를 설치한다는 것에 대해 상언하다
        外之事, 家家有封君之樂, 世世存事大之體, 作別乾坤, 稱小中華, 凡三千九百年于玆矣。 黃溍以爲仕國, 黃儼亦曰天堂, 元 世祖使我以儀從舊俗, 高皇帝許我以自爲聲敎 。 然使我自爲聲敎者, 非徒言語不通, 習俗亦異。 以元末紅軍二十萬人, 闌入我疆, 我以大兵擊斬殆盡, 軍聲大振, 聞于天下, 且皇明定都金陵, 而本國與北元連境, 勢不得不如是也。 或以爲, ‘中國之於東方, ...

    3. 성종실록 208권, 성종 18년 10월 12일 戊寅 1번째기사 / 중국 사신의 접대에 시위 군사의 예모를 전교하다
        其還也, 言曰: ‘朝鮮實是知禮之國, 其稱小中華, 非虛語也。’ 稱嘆不已。 副使張瑾曰: ‘只有一事不如中朝, 中朝殿上衛士, 雖盛暑汗流, 身不敢動。 今見侍殿上者, 左右顧視, 稍失禮貌云。’ 臣請於天使接待時, 衛士勿令旋視, 以嚴禮貌。 且令堂上官以上, 竝服胸背圓領, 以別朝官等級何如?" 傳曰: "卿言甚當。 侍衛 之士數數代替, 勿令顧視。 胸背亦從品穿着。"

    4. 중종실록 7권, 중종 3년 10월 22일 丙戌 1번째기사 / 조강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불시의 고강·적절한 교수·독서당 예우 등을 아뢰다
        上曰: "人才之不作如是, 故已令推考該曹及館學官員耳。" 說經成世昌曰: "讀書堂支應等事, 不足數也。 如書冊、紙、筆不足, 國家所藏書冊亦多, 請移置, 以便觀覽。" 參贊官李世仁曰: "今日所啓, 皆養育人才事, 請留意焉。 我國雖在海外, 中朝以文士之多爲美, 先是天使倪謙出來, 見成三問、朴彭年之才, 稱爲小中華。 今弘文館官員有將來者, 使久居其任, 以成華國之才。"

    5. 중종실록 17권, 중종 7년 12월 26일 丙寅 1번째기사 / 대사헌 남곤 등이 소릉의 일을 상소하다
        國視之, 與安南、交趾無異, 而中國之人, 不鄙夷之, 至稱小中華。 豈非以世修禮義, 君君臣臣父父子子, 民彝物則, 猶足可觀故耶? 今數千年間十六代帝王所無之事, 而獨於我朝鮮見之, 則非唯負愧於前古, 亦且負愧於中國。 此非獨一世君臣之所大恥也, 抑吾東方億萬年無窮之大恥也。 臣等又聞, 神道與人道, 無小差爽, 光廟禮陟之後, 與祖宗列聖, 昭列于天, 於世宗, 則...

    6.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1일 丙申 1번째기사 / 홍익한이 금한을 배척하고 명분을 세울 것을 상소하다
        , 臣妾我君臣者, 實由是耳。 我國素以禮義聞天下, 稱之以小中華, 而列聖相承, 事大一心, 恪且勤矣。 今乃服事胡虜, 偸安僅存, 縱延晷刻, 其於祖宗何, 其於天下何, 其於後世何? 且胡差所帶來, 半是新附西㺚云。 西㺚之於我, 旣無交聘之禮, 奚有儐接之道? 拒而不納可也, 而入境有日, 迄無廟堂一言, 臣未知處廟堂者何人, 而高枕熟睡, 尙不覺悟也? 噫! 身居...

    7. 숙종실록 44권, 숙종 32년 12월 26일 庚戌 2번째기사 / 보덕 최계옹이 관원들의 풍기 문란을 염려하는 상소하다
        位 高士夫, 亦且爲之。 念此箕方, 古稱小中華, 衣冠文物, 不改舊制, 而俗習胡舞, 恬不知恥, 則哀我東人, 亦已化爲胡矣。 甚至於向者進宴時, 內宴外習儀之日, 所謂都監二提調, 私諭舞處容者, 乃行淫褻之戲, 觀者駭目。 若非其時一提調呵禁, 則威儀肅敬之地, 終不免爲褻慢之場, 此豈聖世所宜有也? 答曰: "上款所陳, 予當留意, 而疏末指斥吏判之說, 太不近理, 決知其孟浪也。"

    8. 숙종실록 65권, 부록 / 숙종 대왕 행장(行狀)
        文物, 燦然可述。 使我東國, 至今冠帶, 克明五常, 以得小中華之稱者, 箕子之力也。 其令主文之臣, 別構祭文, 遣都承旨, 致祭于箕子廟。" 仍命承旨曰: "別遣承旨, 重其事也, 卿須致敬行祀, 廟宇墳(瑩) 〔塋〕 , 如有頹圯, 一一書啓, 以爲修葺之地, 子孫中可合錄用者, 亦爲訪問。" 承旨白: " 檀君、東明王廟, 亦在其處, 自世宗朝, 春秋降香祝, 似當一體行祭。" 王曰: "先祭箕子廟...

    9. 숙종실록보궐정오 19권, 숙종 [보궐정오실록] 14년 6월 14일 乙卯 1번째기사 / 이조 판서 박세채가 올린 시무 12조
        本朝繼高麗之末運, 用文爲治, 典章名物, 粲然具備, 足稱小中華 之號, 而經歷變故, 世降俗弊, 行於家者, 旣未淳厚, 措諸國者, 亦多苟簡, 類爲掩遮欺謾之科, 雖喪其所賦天理之眞, 而不自覺察, 風敎不競, 奸僞百出。 今當大矯其弊, 凡於制度云爲之間, 必思有以渾然誠確之心, 白直行事, 內不欺己, 外不欺人, 一以忠信篤厚, 久而不變, 使下之人, 觀感從化, 則終當有所正矣。 二曰,...

    10. 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 2월 14일 甲午 6번째기사 / 사은 정사 박명원과 부사 윤승렬의 장계의 별단
        接待, 逾於常格, 文華彬彬, 禮栗껌濟, 令人起敬。 素稱小中華, 儘非虛語。" 又有江西人戴均, 元現官翰林, 稱阿肅爲老師, 自稱門人。 話語間以爲: "老師回京後往見, 則盛道東方禮義之彬蔚, 接待之隆厚。" 云。 大略與狄翔言, 別無差殊。 一, 皇帝御小殿, 招立通官於第一門密邇之地, 使黃門, 傳授書冊、筆墨等物種, 而傳授之際, 黃門還入復出者, 爲二三次。 蓋擇...

    11. 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 4월 14일 癸巳 1번째기사 / 역적을 토벌한 것에 대해 하례하다
        特軫大義之昭揭; 刑政再恢於湖海, 庶幾民志之交孚。 不意小中華尙禮義之邦, 乃有極悖亂、至凶慘之變。 嘻! 其痛矣, 尙忍言哉? 逆賊夏材, 此殆天地開闢以後所無, 亦豈日月薄蝕之變可比? 生於乙丑血黨, 以三賊竝稱, 歲則甲辰, 甘心與一鏡同死。 一種莾、操之逆節, 古或有聞; 百倍雲、海之凶言, 今始創見。 千奇萬怪之層出, 縱云事變無窮; 九法、三綱之尙存, 胡乃斁絶...

    12.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 5월 22일 辛酉 2번째기사 / 인현서원의 명칭 개칭 등에 관한 채제공·이병모·이서구 등의 논의
        刑曹參判徐龍輔、原任奎章閣直閣金祖淳、承政院右承旨洪仁浩, 是秉模議。 備邊司堂上李書九則曰: "中國亦有箕子墓, 則在平壤者, 豈出傳疑? 享祀之不擧, 非有歉於崇報。 創行新典, 恐難遽議。" 敎曰 : "東國稱小中華, 而三韓以前, 大樸之尙爾, 儀文多草創, 至今未遑於應行之典禮而然乎? 與院名一款, 更令禮判, 博考指一草記。"

    13. 정조실록 49권, 정조 22년 9월 1일 辛酉 1번째기사 / 사학 유생 유춘주가 신약추에게 형률을 적용하길 상소하다
        臨御二十有餘年, 明理講義, 以繼述我列聖朝志事, 以賁飾我小中華文物。 其所以褒尙節義, 扶植倫綱者, 靡不用極, 又此新刊《春秋》, 重揭日星, 固宜人心底定, 世道歸正。 而一種 怪鬼, 換面迭出, 至有至凶絶悖之說, 登諸章奏, 世間變怪, 可謂無不有也。 蓋其全篇褻慢, 遣辭奰戾, 亂言之不足, 至於悖經, 悖經之不足, 至於辱國, 此豈洪水猛獸之災而已哉? 至若封山之說, 尤極...

    14. 정조실록 52권, 정조 23년 12월 21일 甲辰 2번째기사 /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상차하여 《흥왕조승》 4편을 올리다
        風氣相近, 聲敎攸漸, 衣冠悉遵華制, 文字不用番梵, 或稱小中華, 或稱君子之國, 與夫侏𠌯左袵之俗, 逈然 不同。 而第自王氏之世, 壤接靺鞨, 媾連蒙元, 故禮敎不興, 倫紀不明。 擊剌以爲能事, 叛亂殆無虛歲, 檀、箕之遺風, 漠然不可見矣。 何幸天開鴻荒, 運屆熙明, 我朝之興。 適會於皇明, 肇造區夏之時, 錫號賜冕, 視同內服。 乾坤與之合德, 神人爲之夾助, 於是乎我太祖大王...

    15.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12월 22일 甲子 1번째기사 / 사학을 토죄하고 인정전에서 진하를 행하다. 반교문
        , 四海歸仁, 有過化存神之妙。 詎意極西方陰沴之氣, 闖入小中華禮義之邦? 敢欲滓穢太淸, 所事者蛇神、牛鬼, 幾至誑惑半世, 其說則地獄、天堂, 神父、敎主之稱, 崇奉過於尸祝, 十誠、七克之目, 誕妄類於讖符。 喜生惡死人情 也, 而視刀鋸如袵席, 追遠執本天理也, 而以烝嘗爲弁髦, 若敖之鬼不其餒, 而中冓之言亦可醜也。 紏結錮族、廢孽、怨國、失志之輩, ...

    16. 순조실록 26권, 순조 23년 8월 2일 戊戌 1번째기사 / 성균관에서 거재 유생들이 서얼들이 상소한 것에 대해 권당한 소회를 아뢰다
        貴賤之所係, 天道行而人紀立焉。 猗歟! 本朝, 海外尙文之小中華也。 三韓之際, 羅、麗之間, 猶未免夷俗之陋, 逮夫我太祖, 太宗, 明倫於勝國崇佛之後, 陳常於勝國蔑儒之餘。 凡係名分二字處, 其嚴有截, 其等有隔, 一洗舊染, 如日中天。 際於其時, 大明 高皇帝, 頒我以禮法之書, 賜我以冠裳之制, 儀節之隆殺, 名位之等級, 井井有區域, 分不得踰寸, ...

    17.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 4월 1일 丙午 10번째기사 / 승정원에서 목태석의 국문을 청하다
        求過於無過之地。 敢言其所不敢言, 遣辭狂悖, 用意陰慘, 此不但我朝之賊臣, 實是皇朝之罪人。 此而不嚴加重辟, 則義理日益晦蒙, 人心日益陷溺, 而小中華一域, 無復讀《春秋》者。 且其龍淵 山虎等句語, 絶悖無嚴, 此豈人臣所敢道哉? 終篇旨意, 極其閃忽, 要不出挾雜之計, 已施之律, 不足以懲其罪。 請島配罪人睦台錫, 亟令王府拿鞫嚴問, 決正典刑。" 答曰: "勿煩。"

    18. 헌종실록 14권, 헌종 13년 8월 9일 乙卯 3번째기사 / 성근묵이 상소하여 이양선에 대해 보다 더 단호한 대처를 하도록 하다
        , 見陵於邪賊, 惟以保養妖邪, 爲緩禍之長策, 則將見我小中華一域, 淪胥爲妖獸怪鳥而莫之救也。 從古戎狄之禍, 豈有善惡之可辨, 而至於此賊, 則肆然稱義理, 俑厥無前之異端, 以威脅聖人之道, 此華夷、人獸之大關棙也。 楊、墨之道, 非身親爲亂臣賊子之事也, 孟子曰, ‘仁義充塞, 率獸而食人’, 又曰, ‘能言拒楊、墨者, 聖人之徒也。’ 彼之使船, 如馬橫行大海,...

    19.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1월 7일 陽曆 3번째기사 / 김병시가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肇自箕聖東 渡, 敎民八條, 典章文物, 燦然大備, 稱之以小中華。 曁我朝聖神相繼, 重熙累洽, 式克至于今日休, 夫何拚棄前聖懿規、先王遺制, 遂至於此? 是豈可忍? 設有當行規則, 係非尋常變更, 則宜其廣詢於在廷諸臣而處之。 勅令遽降於俄忽之間, 人莫敢窺其裏許, 此又何事也?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此孔夫子之言也。 萬世夫子之言, 亦不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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